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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댁 in 미국 시골/유학생 와이프 일기

[유학생 와이프] 이역만리 독박 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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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 반년 전 아기가 태어났다. 보통 미국에서 출산하는 경우, 친정어머니(여의치 않으면 시어머니)께서 미국으로 오셔서 산후조리를 해주신다. 한국처럼 산후조리원과 같은 시설이 없을뿐더러... 산모의 건강과 입맛에 맞는 미역국이니 소불고기니 한식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한인 커뮤니티가 큰 뉴욕이나 L.A 같은 경우, 산후도우미로 일하는 분들이 많아 입주 형태로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 경우, 가격은 3주에 4천 불 선이다. 타주에 사는 경우, 이 분들을 모셔오는 비행기 표까지 지불해야 하니 3주 산후조리를 받는데 500만 원은 우습게 깨지게 되는 것이다.

 

나는 친정어머니가 계속 일을 하고 계셔서 (사실 친정부모님을 포함한 4분의 양가 부모님들이 모두 일을 하고 계신다.) 산후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입주 도우미를 모셔올 만큼 배짱부릴 형편도 안되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세운 대략적인 계획은 이러했다. 

1. 기본적인 산후조리는 남편이 해준다. 
2. 대신, 음식은 남편이 자신이 없으니 도움을 받는다. 

아기를 돌보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 남편은 나와 함께 병원에서 진행하는 6주짜리 출산교실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 사는 음식 솜씨 좋은 이모님 한분이 일주일에 2~3번씩 우리 집에 오셔서 음식을 해주시기로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보였다.

 

하루종일 심기가 불편하신 아기

 

우리의 계획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바로 병원에서였다. 내가 출산한 병원은 24시간 모자동실을 운영하는 곳이었다. 나는 응급 제왕절개 수술을 한 직후부터 모유수유를 해야 했다. 병실에서 푹 쉬고 싶지만 아기는 하루 종일 빽빽 울었고, 그 소리에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도저히 쉼을 가질 수 없었다. 남편은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랴, 산모를 수발하랴 정신이 없었다. 병원에서 5박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우리 부부는 녹초가 된 상태였다. 병원에 있는 동안, 우리 부부는 각자 하루에 4~5시간 이상을 자지 못했다.

 

병원 입원 3일째 되는 날, 남편이 도저히 집에 돌아가 본인이 혼자 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장 급한 대로 파트타임으로 와서 빨래, 청소, 설거지 등 집안일이라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 하루아침에 구해질 리가 없었지만 다행히도 지인 몇 분과 이웃집 새댁이 도움을 주기로 했다. 다들 본업이 있는 분들 이어서 스케줄을 정하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2~3시간씩 일해주고 갔다. 정말 매일같이 오실 때마다 집안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아기가 토를 자주 해서 침대 시트는 거의 매일 빨아야 했고, 각종 아기 옷과 가재 수건, 수많은 젖병들, 설거지, 그리고 내가 먹을 과일을 씻어 잘라주는 일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아기를 돌보는 것은 결국 내 몫이었다.

 

내가 혼자 아기를 돌보게 된 이유는 퇴원 일주일 후에 남편의 퀄 시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산후조리해주겠다고 큰소리치던 남편은 본인 일을 하는 것으로도 벅차 보였다. 나는 아기를 돌보느라, 남편은 시험 준비를 하느라 1주일 동안 나와 남편은 역시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 1주일은 학기말 시험이 있어 남편은 본인 시험을 준비하고 TA로 일하는 수업의 시험을 채점하고 성적 매기는 일을 해야 했다. 그렇게 추가로 1주일을 나와 남편은 날밤을 샜다.

 

정신력으로 2주를 버티고 드디어 남편의 모든 일이 끝났다.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온 남편을 배부르게 먹이고 낮잠을 푹 재웠다. 저녁이 다되어 일어난 남편의 얼굴에 조금 생기가 생겼다. 그리고 바로 나는 남편에게 아기를 넘겼다. "오늘부터 밤중 수유는 당신이 해!" 하루하고 그다음 날 밤이 되자 남편이 매우 힘들어했다. 너무나도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응수했다. "나는 수술하고 지난 3주 동안 밤중 수유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어차피 남편이 계속 밤중 수유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생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스케줄을 짰다.

 

물론 남편은 방학에도 연구실에 출근을 해야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방학이어서 조금은 여유가 있어 가능한 스케줄이었다. 이런 식으로 거의 100일까지 생활했다. 집안일은 2달이 넘는 시간 동안, 다른 분들의 도움을 받았고 우리 부부는 아기만 봤지만 말할 수 없이 고된 시간이었다. 참고로 위의 그림을 남편에게 보여주니 남편은 매우 억울해했다. 본인이 저녁에 자유시간을 보낸 건 맞지만 그 시간이 결코 그림처럼 즐거운 여가시간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저녁에 집에 오면 생존에 필요한 밥 먹기, 씻기, 쪽잠 자기 등을 하고, 밀린 일처리를 하며 정말 하루에 1~2시간 정도만 TV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본인도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는 것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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